자본주의와 싸우는 여성해방운동을 만들자!

발제자: 김민재(사회주의정당건설연대 정책위원장)

들어가며

오늘의 집담회는 제목에서 밝히고 있듯 여성해방운동이 자본주의와 싸워야 한다고 보고, 이런 운동을 어떻게 만들어갈 수 있을지 함께 이야기하기 위한 취지에서 열렸다. 발제자는 2017년경부터 여러 글을 통해, 2019년에는 공저로 책 『페미니즘인가 여성해방인가 – 사회주의에서 답을 찾다』를 출간함으로써 여성해방운동이 자본주의와 싸우는 사회주의 여성해방운동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주장해왔다. 하지만 오늘의 집담회에서 ‘자본주의와 싸우는 여성해방운동’을 이야기하는 것은 좀 더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발제문에서 이야기할 ‘자본주의와 싸우는 여성해방운동’은 ‘페미니즘 리부트’가 지나가고 여성해방운동이 활력을 잃은 바로 지금의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정세 분석과 과제 설정으로부터 나온 결론이기 때문이다. 여성해방을 열망하는 마음으로, 여성해방운동을 다시 힘 있게 세워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집담회에 참석해 주신 청중분들께 감사드리며, 오늘 집담회에서 우리가 지금 어디에 서 있고, 우리에게 제기되는 과제는 무엇이고, 이를 위해 우리가 함께 어떤 실천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진솔하고 활발한 이야기가 오가기를 기대한다.

1. 현재 여성해방운동은 어떤 상태에 있는가?

현재 여성해방운동은 활력을 잃은 상태에 있다.

몇 년 전, 거리와 광장은 성차별과 성폭력, 여성에 대한 폭력에 대해, 여성의 권리를 억압하는 법제도에 대해, 무엇보다 여전히 고달프고 열악한 삶에 대해 분노한 여성들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여성들은 만연한 차별과 억압에 대해 목소리를 내며, 거리와 광장뿐 아니라 자신들의 일상, 학교, 일터, 온라인 공간까지도 치열한 투쟁의 장으로 변모시켰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난 지금 거리와 광장은 비었고, 세상은 다시 고요해진 듯하다. 여성에 대한 폭력이나 차별은 여전히 끊이지 않고 있고, 다수 여성들의 삶은 경제상황의 악화 속에서 더욱 어려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억압 문제에 대해 이렇다 할 대중적인 투쟁은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 신당역 여성 노동자 스토킹 살해 사건, 신림동 등산로 여성 살해 사건 등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 사건도 여전히 많지만 과거만큼 강력한 행동을 촉발시키고 있지는 못하다. 2015년부터 고양되었던 여성해방운동은 현재 그 활력을 상실한 상태에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백래시만으로는 여성해방운동이 활력을 잃은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여성해방운동의 주체적 상태 자체에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

여성해방운동이 활력을 잃은 이유에 대해 대부분의 페미니스트들은 ‘백래시’를 제시한다. 안티페미니즘 정서를 가진 20대 남성들과 그들에 기대어 집권한 수구세력이 자행한 페미니즘에 대한 각종 공격과 반발, 즉 ‘백래시’ 때문에 활동가들이 소진되고 운동이 위축되었다는 것이 페미니스트들의 공통적인 주장이다.

가령 지난해 11월에 열린 한국여성대회 2022년 추계학술대회의 제목은 다름 아닌 “백래시의 시대, 페미니즘의 재반격”이었다. 올해 3.8 세계 여성의 날 즈음 여성노동연대회의에서 개최한 2023 여성노동자대회의 제목도 “세상이 후퇴해도 우리는 앞으로”였고, 한국여성대회에서 발표된 선언문의 제목도 “퇴행의 시대를 넘는 거친 연대의 파도가 되어 성평등을 향해 전진합시다”였다. 올해 상반기에는 『백래시 정치-안티페미니즘은 어떻게 권력이 되었나』 (신경아)라는 책이 출간되어 여러 페미니즘 관련 모임 등에서 많이 읽히고 있다.

그러나 ‘백래시’가 심각하다는 이야기는 이미 여성해방운동의 고양이 시작되던 무렵부터 나왔는데, 당시의 ‘백래시’는 여성해방운동의 강한 기세와 활력 앞에서 크게 부각되지 못했다.

단적으로 2017년 12월에 『한겨레21』에는 「페미니즘, 반격을 맞다」라는 특집 기사가 실렸고, 해당 기사는 안티페미니스트들의 집회,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에 대한 각종 신상털기나 공격 등을 거론하며 한국에서 페미니즘 ‘백래시’가 거세다고 진단했다. 또한 2018년 4월에는 한국여성민우회 주최로 “페미니즘 백래시, 그런 이유로 멈추지 않겠다”라는 라운드테이블이 개최되었다. 여성단체 SNS를 팔로우했다는 등의 이유로 일터에서 불이익을 받는 등의 ‘백래시’ 사례 182건이 발표되었다. 이 외에도 2018년에는 지방선거에서 페미니스트를 표방한 후보의 벽보 훼손, 대학 내 총여학생회 폐지 흐름 등이 있었다. 이런 상황들만 보면 마치 2017년, 2018년도 ‘백래시의 시대’로 규정되어야 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지금 우리 모두 알고 있듯이 ‘백래시’에 관한 라운드테이블이 개최된 지 불과 몇 개월 후인 2018년 8월, 혜화역에서 전례 없는 규모의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 시위가 개최되었다. 지금 2018년을 여성해방운동에 대한 ‘백래시의 시대’로 기억하는 이는 거의 없다. 그 반대로, 2018년은 침묵하던 여성들이 대거 거리로 나서서 저항하고 목소리를 내며 위력적인 싸움을 만들어냈던 시기, 심지어 동네 호프집에 가도 옆 테이블에서 불법촬영과 혜화역 시위에 대한 논쟁을 들을 수 있던, 여성해방운동이 뜨거웠던 시기로 역사에 남았다.

이렇듯 ‘백래시’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여성해방운동의 활력이 살아 있다면 ‘백래시의 시대’는 오지 않는다. 만약 지금이 ‘백래시의 시대’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여성해방운동의 활력이 사라진 결과 운동에 대한 공격 즉 ‘백래시’만 남았기 때문인 것이다. 즉 현재 부각되어 보이는 ‘백래시’는 여성해방운동이 활력을 잃은 원인이라기보다는 결과라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백래시’만으로는 여성해방운동이 활력을 잃은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백래시’라는 외부적 조건 이전에, 강력하고 기세 있던 여성해방운동이 활력을 잃은 이유를 여성해방운동의 주체적 상태 자체에서 찾아야 한다.

여성해방운동의 주체적 상태의 문제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페미니즘 내에서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한 한국여성학회 2022년 추계학술대회의 한 세션에서 발표자로 나선 엄혜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지금 한국 사회의 백래시 현상이 ‘신자유주의적 능력주의’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데, 페미니즘에서 “불평등을 생산하는 구조의 문제나 여성노동, 재생산의 문제에 관한 정치적 논의는 답보 상태”에 머물렀고 “여성들도 신자유주의적 능력주의와 불화하지 않거나 도전하지 않으면서 페미니즘 의제가 ‘주체성’ ‘자기결정권’ ‘피해자’ 담론 정치에 상대적으로 몰두해온 한계”가 있었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페미니즘은 돈이 된다’거나 ‘정상에서 만나자’라는 등 소비자 또는 자기계발하는 주체로서 야망을 갖고 개인의 성공과 부를 추구하는 것”도 ‘포스트페미니즘 현상’의 하나라고 비판하였고, 이제 “신자유주의적 능력주의에 대한 대안기획으로서 페미니즘을 상상하고 새로운 정치의 형성을 도모해야 할 때”라고 주장하였다(한겨레신문, 「“나도 피해자” 페미니즘의 언어, 백래시로 돌아왔다」, 2022년 11월 19일).

그러나 이러한 진단과 대안 제시 역시 피상적이다. ‘신자유주의적 능력주의’를 주된 투쟁 대상으로 설정하는 인식이 타당한지 여부는 제쳐두더라도, 애초에 페미니즘 운동에서 불평등을 생산하는 구조의 문제나 여성노동의 문제에 관한 정치적 논의가 제대로 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 위 진단에서 언급되는 ‘페미니즘은 돈이 된다’거나 ‘정상에서 만나자’라는 식의 흐름에 대해, 페미니즘 내에서도 나름대로 ‘교차성’을 거론하며 비판하는 흐름이 있었는데, 왜 그런 비판은 무기력했을까? 불평등을 생산하는 구조가 무엇인지, 여성노동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려면 어떤 정치가 필요한지를 분명하게 규명하고 제시하는 것이 페미니즘의 틀 속에서 과연 가능했던 것일까? 위와 같은 진단은 이런 질문들에 대해 답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성해방운동이 활력을 잃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다른 외부적 요인이 아니라 페미니즘이라는 기존의 사상적 틀 자체의 한계에 있다.

여성해방운동이 활력을 잃은 이유는 페미니즘 자체의 한계에 있다
여성해방운동에 나선 여성들이 제기한 두 가지 과제: 여성억압의 근본 원인 규명, 여성들의 악화되는 삶의 문제 해결

2015년부터 여성해방운동이 고양되기 시작하면서 새롭게 운동으로 유입된 여성들은 크게 두 가지 과제를 제기했다.

첫 번째로, 여성들은 ‘어떻게 하면 지금 당장 여성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하며 여성억압에 맞선 싸움을 끝까지 밀어붙이고자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여성억압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 명확한 답을 요구했다.

2015년경부터 여성해방운동에 새롭게 유입된 여성들의 특성으로 디지털 문화에 대한 친화성, ‘미러링’의 방법으로 혐오를 적극적으로 되돌려주었다는 점 등이 종종 언급된다. 그러나 더 핵심적인 특성은 바로 이들이 여성억압에 맞선 싸움에서 ‘적당히’ 타협하는 것을 거부하고, 끝까지 철저하게 싸워보고자 하는 욕구를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오랜 침묵을 깨고 누적되어 온 여성억압에 반격하기 시작한 여성들은 일상, 학교, 일터 등 마주하는 모든 곳에서, 지금 당장 여성억압을 철저히 뿌리 뽑기를 원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여성억압의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 이루어져야 했다. 여성들은 이 핵심 쟁점을 집중적으로 파고들며 명확한 답을 원했다. ‘래디컬 페미니즘’ 입장에 동조하는 10대, 20대 페미니스트들을 심층 면접하여 그런 입장을 갖게 된 이유를 분석한 한 논문에 따르면, 청년 여성들은 학교 등 일상 공간에서 늘 마주하는 성차별에 대해 신속하게 반박하고 효과적으로 대항하고자 했고, 이를 위해 자신이 겪는 성차별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간명한 논리”를 필요로 했고, “명료한 하나의 억압의 원인을 찾아내고자” 했다고 한다(송지수, 「페미니즘 알기의 의미: 10-20대 여성들의 TERF지지 입장을 중심으로」, 2021). ‘래디컬 페미니즘’이 과연 실제로 여성억압의 근본 원인에 대한 올바른 답을 제시하는지 여부와 별개로, 그런 입장이 확산된 배후에는 바로 여성억압의 근본 원인에 대한 명확한 답을 얻고자 한 청년 여성들의 열망이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로, 청년 여성들은 실업, 주거문제, 빈곤 등 계속 악화되는 삶의 문제의 해결을 원했기에, 삶의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힘 있는 싸움을 만들어내는 것이 과제로 제기되었다.

여성해방운동의 고양 흐름의 핵심 주역인 90년대생, 2000년대생 여성들은 대부분 가정이나 학교에서는 딸도, 여학생도 남성만큼 성취를 할 수 있고 해야 한다는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그러나 이들이 성인이 되어 마주한 현실은 달랐다. 여전히 남성 노동자에 비해 임금, 노동조건에서 차별을 받고, 더 열악한 위치에 놓이는 여성 노동자의 현실은 법제도적, 공식적인 평등이 천명된 상황과 대조를 이루었다. 비록 2015년경부터 고양된 여성해방운동은 표면적으로는 주로 여성에 대한 폭력이나 일상 속 성차별적 언행과 같은 문제들을 쟁점으로 하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여성해방운동이 그와 같이 거대한 흐름으로 일어날 수 있었던 배경, 동력에는 실업, 주거문제, 빈곤 등 여성들의 악화되는 삶의 문제가 존재했다. 특히 2020년 세계대공황의 발발은 20대 여성 노동자들의 삶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2020년 3월에만 20대 여성 12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2020년 상반기 20대 여성 자살사망자 수는 2019년 상반기 대비 무려 43% 증가하였고(보건복지부), 이는 ‘조용한 학살’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악화되는 실업, 빈곤 등 여성들의 삶의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힘 있는 싸움을 만들어내는 것이 절실한 과제로 제기되었다.

하지만 페미니즘은 여성들이 운동 속에서 제기했던 이러한 과제들을 수행하는 데 실패했다. 이는 여성해방운동이 고양되면서 새롭게 나타났던 흐름인 ‘래디컬 페미니즘’이든, ‘교차성’을 거론하며 이 흐름을 비판했던 기존 페미니즘이든 마찬가지였다.

여성억압의 근본 원인을 묻는 여성들에게, 올바른 답을 제시하지 못한 페미니즘

여성해방운동이 고양되면서 새롭게 운동에 유입된 많은 여성들은 한국여성단체연합이나 한국여성민우회 등을 위시한 기존 페미니즘 흐름과는 구별되는, ‘래디컬 페미니즘’이라는 새로운 흐름을 형성했다. 여성억압의 문제를 철저히 파고들지 않은 채 ‘모든 억압은 연결되어 있다’ 등의 애매한 말만 반복했던 기존 페미니즘 흐름과 달리, ‘래디컬 페미니즘’은 적어도 여성들이 제기한 ‘어떻게 하면 지금 당장 여성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진지하게 붙들었고, 이에 대한 나름의 답을 제시하고 그것을 끝까지 밀어붙였다. 이는 기존 페미니즘의 불철저함에 불만을 느끼고 있던 여성들에게 반향을 일으켰고, 강력한 힘으로 작용했다. 2018년에 혜화역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 시위에 연인원 35만 명 가량의 여성들이 모일 수 있었던 것, ‘여성의당’이 2020년 총선에서 창당 38일 만에 20여만 표를 얻을 수 있었던 것 등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앞서 언급된 「페미니즘 알기의 의미: 10-20대 여성들의 TERF지지 입장을 중심으로」에서도 10대, 20대 여성들이 ‘래디컬 페미니즘’ 입장으로 이끌린 이유는 이들이 원했던 성차별에 대한 “간명한 논리”, “명료한 하나의 억압의 원인”을 나름의 방식으로 제시한 것이 ‘래디컬 페미니즘’이었기 때문이었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핵심적인 질문을 제대로 던져 놓고, 그에 대해 틀린 답을 제시하였다. 이들은 개별 남성들이 여성억압의 원인이라고 주장하였다. 남성이 여성억압의 원인이기에 여성들이 남성과의 친밀한 관계를 일절 거부하고, 남성이 좋게 보는 모든 행동(가령 외모꾸미기)을 거부하자는 이들의 주장은 처음에는 속시원하고 명쾌해 보였지만, 이런 방법으로 여성해방을 이룰 수 없음이 점차 드러났다. 또한 ‘래디컬 페미니즘’은 협소하게 정의된 ‘생물학적 여성’만이 여성운동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보는 극단적인 정체성 정치의 입장에 서서 트랜스젠더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자행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혜화역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 시위에 ‘생물학적 여성’이 아닌 트랜스젠더나 남성은 참가할 수 없었던 것, 숙명여대에 합격한 트랜스여성의 입학에 대해 반대한 것, 트랜스여성인 고 변희수 하사에 대한 차별과 억압, 각종 혐오 선동에 동조한 것, 심지어 ‘래디컬 페미니즘’ 입장의 출판사인 열다북스가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제정을 반대한 것 등이 이를 잘 보여주었다. 이런 과정에서 ‘래디컬 페미니즘’은 점점 더 자기 한계를 드러내며 여성들의 대안이 될 수 없음을 스스로 드러냈고, 퇴행적인 세력이 되어 점차 존재감도 거의 없어졌다.

‘래디컬 페미니즘’이 핵심적인 질문을 제대로 던져 놓고 그에 대한 잘못된 답을 제시했다면, 한국여성단체연합(이하 ‘여연’), 민우회 등으로 대표되는 기존 페미니즘은 그 핵심적인 질문 자체를 회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기존 페미니즘은 ‘래디컬 페미니즘’의 ‘여성 인권 우선’, ‘여자만 챙기자’ 등의 슬로건에 대해 비판하면서 상호교차성 담론을 거론하고 ‘모든 억압은 연결되어 있다, 다른 피억압집단과의 연대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했다. 하지만 이들은 그래서 여성들이 어떻게 하면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인지, 여성억압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지금 당장 억압을 철폐하기 위해 싸울 방법을 묻는 여성들 앞에서 이들은 상호교차성에 관련된 논의를 인용하며 여러 억압이 “서로 얽히고 연결되고 맞물리며 상호작용하고 서로를 구성하는 관계에 있”다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김보명, 「공백으로부터, 아래로부터, 용기로부터 시작하는 페미니즘, 교차성」, 『교차성×페미니즘』, 2018). 즉 이들의 ‘래디컬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은 도덕적, 윤리적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이들이 주장한 상호교차성 담론은 그저 ‘래디컬 페미니즘’이 타당하게 제기한 질문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였다.

이렇듯 여성들이 제기한, 여성억압의 근본 원인에 대한 답을 제시하라는 과제에 대해 ‘래디컬 페미니즘’도, 기존 페미니즘도 제대로 된 답을 제시하지 못했다.

악화되는 여성들의 삶의 문제 해결의 전망을 제시할 수 없었던 페미니즘

앞서 살폈듯이 여성해방운동에 나선 여성들은 실업, 주거문제, 빈곤 등 자신들의 삶의 문제의 해결을 원하고 있었다. 이들에게 여성해방운동은 여성들의 삶의 문제 해결을 위한 전망을 제시해야 했다.

그런데 오랫동안 악화될 대로 악화된 여성들의 삶의 문제들은 몇몇 특정 사안들에 대해 일정한 법제도적 개선을 요구하는 정도의 투쟁을 한다고 해결 전망이 생길 수 있는 단계가 아니다. 여성들의 삶의 문제들을 야기하는 주범을 분명하게 지목하고,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 투쟁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힘이 생길 수 있다. 그리고 그 주범은 바로 자본주의다. 당장 여성 노동자들이 남성에 비해 더 낮은 임금을 받고, 노동시장에서 더 열악한 위치에 놓이며 차별받는 것은 자본주의 생산방식의 특성이 임신, 출산 가능성이라는 다수 여성의 생물학적 특성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직장 내 성폭력, 가정폭력을 포함한 여러 폭력적 상황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배경에도 자본주의가 있다. 자본주의와 싸우지 않고서는 여성들의 삶의 문제 해결의 전망을 그리기 어렵다.

결국 여성들의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전망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여성해방운동이 보다 급진화되어, 자본주의와 싸우는 여성해방운동으로 발전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러면서 담론적, 문화적 차원의 성차별에 맞선 투쟁이 여성들의 먹고 사는 문제, 삶의 문제의 해결을 요구하는 투쟁과 결합되도록 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여성해방운동은 2020년 세계대공황으로 여성들의 삶이 크게 악화된 상황 속에서 투쟁의 동력을 계속 확보하며 확장되고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페미니즘이라는 사상적 틀은 여성해방운동이 이런 방향으로 발전하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우선 ‘래디컬 페미니즘’은 여성들의 삶의 문제에 대해 여성 개인들이 야망을 갖고 출세하여 남성보다 높은 자리에 오르면 된다는 식의, 자본주의에 적극적으로 영합하는 해결책을 제시했다(‘야망 페미니즘’). 가령 래디컬 페미니스트로 잘 알려져 있으며 여성의당 공동대표를 역임하기도 했던 김진아는 『나는 내 파이를 구할 뿐 인류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에서 여성들이 결혼 대신 재테크, 펀드나 아파트를 선택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하였다. 또한 여성의당은 신라호텔 이부진 등 여성 자본가들에게 노골적으로 후원을 요청하는 선전물을 제작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기존 페미니즘 역시 ‘래디컬 페미니즘’만큼 노골적으로 자본주의에 영합하는 주장을 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자유주의 수준의 정치적 내용에 머물렀으며, 오래 전부터 자유주의세력과 이미 일체화되어 있었다. 여연 등으로 대표되는 기존 페미니즘이 자유주의세력과 얼마나 일체화되어 있는지는 박원순의 성추행 피소 사실이 다름 아닌 김영순 전 여연 상임대표, 남인순 민주당 의원, 임순영 서울시 젠더특보를 통해 유출되었다는 것이 밝혀짐으로써 결정적으로 드러났다. 나아가 20대 대선을 전후하여 기존 페미니즘 세력의 자유주의세력으로 향하는 흐름은 더욱 노골적인 것이 되었다. 평소에는 ‘상호교차성’이나 진보로 스스로를 포장해오던 페미니스트들이 민주당 박지현에 대해 지지하는 태도를 보이고, 심지어 차악인 이재명에 투표하자는 식의 주장을 펴면서 자유주의 본색을 드러냈다. 이런 세력들이 수구세력과 마찬가지로 자본가정치세력으로서 여성들의 삶의 문제 해결을 철저히 방기한 자유주의세력에 대해 폭로하고 투쟁하거나, 자본주의를 문제 삼으며 싸우는 방향으로 갈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이렇듯 페미니즘에 입각한 여성해방운동은 악화되는 여성들의 삶의 문제 해결을 위한 전망을 제시할 수 없었다.

페미니즘의 사상적 한계, 여성해방운동의 발전에 질곡이 되다

그렇다면 페미니즘은 왜 여성들이 제기한 과제에 응답하는 데 실패했는가? 이유는 바로 페미니즘 자체의 사상적 한계에 있다.

페미니즘은 남성에 의한 여성억압이 다른 모든 억압에 앞선 사회의 근본 모순이라 보고, 이 관점에서 사회를 본다. 그리고 여성과 남성의 관계를 고정불변한 것으로 보고, 여성억압이 시대와 사회를 초월하여 늘 존재한다고 본다. ‘가부장제’ 개념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페미니즘은 어떻게 해서 평등하던 여남 관계가 변화하고 여성억압이 출현하였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 여성억압이 출현한 원인을 설명할 수 없기에 여성억압을 없앨 수 있는 전망도 제시하지 못한다. 즉 페미니즘은 현존하는 여성억압에 대하여 규탄할 뿐 여성억압의 이전도, 이후도 상상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페미니스트들은 처음에는 과격하게 ‘가부장제’를 근본적으로 철폐하자고 하고 여성억압의 현상을 규탄하다가도 어느 순간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의 벽에 부딪히고 만다. 가령 ‘래디컬 페미니즘’이 그랬던 것처럼 남성 전체가 가해자이며 여성억압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더라도, 실제로 남성 전체를 없애거나, 여성들이 남성과 완전히 분리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된다. 그렇기에 페미니즘은 종국적으로는 여성 개인들이 ‘유리천장’을 깨고 남성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된다는 식의 개인적 해결이나, 차별적인 법제도나 문화를 비판하고 일부 개선하는 수준의 운동에 머물며 자본주의체제와 타협하는 길을 걷게 된다. 이는 급진주의 페미니즘이 처음 출현한 미국에서도 나타났던 현상이다.

오랫동안 여성해방운동 속에서 지배적인 사상은 페미니즘이었기에, 2015년경에 여성해방운동의 고양이 ‘페미니즘 리부트’라고 칭해지며 페미니즘에 입각하여 시작되는 것은 불가피했다. 하지만 페미니즘은 처음부터 여성억압의 근본 원인에 대한 명확한 답을, 악화되는 삶의 문제 해결을 위한 전망과 힘 있는 싸움을 원했던 여성들의 열망에 응답할 수 없는 사상이었다. 이 점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 페미니즘은 여성해방운동의 더 이상의 발전을 막는 질곡이 되었다. 여성해방운동은 페미니즘의 틀을 깨고 넘어서서 발전하거나, 아니면 페미니즘이라는 틀을 넘어서지 못한 채 활력을 잃고 소진되거나의 기로에 섰다. 여기서 결국 페미니즘이라는 틀을 넘어서지 못한 여성해방운동은 활력을 잃게 된 것이다.

2. 여성해방운동은 왜 자본주의와 싸워야 하는가?

이렇듯 2015년경부터 고양되었던, 페미니즘에 입각한 여성해방운동은 활력을 잃고 소진되었다. 우리는 여성들이 제기했던 두 가지 과제, 여성억압의 근본 원인 규명과 악화되는 여성들의 삶의 문제 해결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수행할 수 있는 새로운 여성해방운동을 만들어야 한다. 그 새로운 여성해방운동은 자본주의와 싸우는 여성해방운동이어야 한다. 여성해방운동은 왜 자본주의와 싸워야 하는가?

첫째, 여성억압의 근본 원인인 차별적 성별 노동분업을 온존시키는 것이 자본주의이기 때문이다.

여성해방운동이 자본주의와 싸워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바로 여성억압의 근본 원인 자체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를 철폐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여성억압의 근본 원인은 차별적 성별 노동분업인데, 생산력 발전으로 차별적 성별 노동분업의 물적 토대가 상당 부분 약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생산수단을 자본가가 사적으로 소유하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로 인해 이러한 성별 노동분업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앞서 이미 살폈듯이 여성들은 여성억압을 단지 완화시키거나 일부 규제하는 것을 넘어서, 여성억압과 끝까지, 철저하게 싸우기를 원한다. 이를 위해서는 여성억압의 근본 원인 자체를 제거해야만 한다. 페미니즘에서는 마치 여성이 먼 옛날부터 항상 남성에게 종속되어 살아온 것처럼 전제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런 틀 속에서 여성억압의 근본 원인에 대한 논의는 제대로 나오기 어려웠다. 하지만 여성억압은 결코 인류 역사 내내 존재해온 것이 아니며, 인류 역사에서는 여성과 남성이 평등하게 살던 시기가 분명히 존재했다. 그러다 특정 역사적 시기에 다다르자 여성이 남성에 종속되고 지배당하는 사회가 출현한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여성억압의 근본 원인, 기원은 무엇인가?

여성억압의 근본 원인

수렵채집 사회 및 초기농업 사회에는 지금과 같은 여성억압이 존재하지 않았고, 여성과 남성은 평등한 관계를 맺었다. 인류학자 엘리너 버크 리콕은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1972년판 서문에서, 정치적 의사결정에 여성도 동등하게 참여하고, 남편이 부당한 대우를 하면 아내들은 굳이 참을 필요가 없이 바로 떠나 버리거나 친척들을 부를 수 있었던 사례를 언급한다.

당시에 성별 노동분업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수렵채집 사회에서 여성은 주로 채집을 담당하고, 남성은 주로 수렵을 담당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인류 역사 초기 성별 노동분업의 성격은 오늘날의 불합리한 성별 노동분업과 달리 차별적이거나 여성억압적인 성격을 갖지 않는다. 이 시기 성별 노동분업은 맑스가 말한 대로 “남성의 여성에 대한 지배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남녀 모든 인간에 대한 자연의 지배를 반영”하는 ‘자연적 분업’에 해당한다(린다 번햄·미리엄 루이, 「불가능한 결혼」).

결과 면에서도 이 시기 성별 노동분업은 여성에게 억압적이지 않았다. 여성들은 공동체의 의사결정과정에서 남성과 대등한 발언권을 가졌다. 이는 여성이 주로 하는 일이 사회적 생산에 남성과 동등하게 혹은 남성 이상으로 기여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수렵채집민들의 주된 식량은 여성들의 채집으로 얻어지는 식물성 식량이었고, 수렵으로 얻어지는 육류는 보충적 역할을 했다. 그리고 약 1만 년 전에, 유랑하던 수렵채집민들이 정착하여 경작을 하기 시작하는 이른바 ‘신석기 혁명’이 서서히 일어나서 초기 농경사회로 이행했을 때도, 여전히 주된 식량은 괭이나 뒤지개로 경작하는 여성의 농업노동에서 나왔기 때문에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지위를 누렸다.

그런데 생산력이 발전하고 중농업 사회로 이행하면서 과거에 사용하던 농기구(괭이, 뒤지개)보다 신체적 근력을 보다 더 많이 필요로 하는 농기구(쟁기)와 가축이 사용되는 등 농업 기법의 전환이 발생하였다. 이는 평균적으로 남성보다 근력이 약한 여성이 사회적 생산에 참여하는 것을 보다 어렵게 만들었다. 동시에, 수렵채집을 하며 유랑생활을 할 때는 출산을 어느 정도 제한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생존에 유리했지만, 이와 달리 초기농업 사회부터 점차 정착생활을 하게 되자 굳이 출산을 제한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여성들은 과거보다 많은 시간을 임신 상태로, 혹은 수유를 하며 보냈다. 이러한 변화들로 인해 여성들은 서서히, 사회적 생산에서 남성에 비해 부차화되었다. 사회적 생산에서 남성의 노동이 여성의 노동보다 중요성을 갖게 됨에 따라 성별 노동분업은 여성에게 억압적인 것이 되었다. 요컨대 생산이 발전하여 중농업 사회로 접어들자 성별 노동분업의 성격이 변화한 것이 여성억압을 낳았다고 할 수 있다. 여성억압의 근본 원인을 한마디로 말하면 차별적·억압적 성별 분업이다.

차별적 성별분업의 물적 토대가 약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차별적 성별분업이 여전히 유지되는 이유

생산의 발전은 여성억압을 출현시킴과 동시에 잉여생산물과 사유재산을 출현시켰고 이는 계급과 국가의 발생으로 이어졌다. 즉 계급억압은 여성억압과 같은 시기에 출현하였으며, 두 억압은 서로가 서로를 강화하는 역할을 하였다. 계급사회에서 지배계급은 자신의 지배를 확립, 유지하기 위해 여성억압을 적극 활용했다. 여기서 자본주의 역시 예외는 아니다. 다만 자본주의는 여성을 억압하는 동시에 생산력을 발전시켜 여성이 그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는 물질적 토대를 마련하는 역할도 했다. 여성들은 전자본주의 시기에 비해 임신, 출산을 조절하는 의학기술에 상대적으로 더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가사노동의 부담 역시 기술의 발전으로 크게 줄어들었다. 무엇보다 핵심적으로 여성들은 기계 등 기술 발전에 힘입어 과거에는 근력 차이를 이유로 남성들만 맡던 직업을 충분히 맡을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여성들은 계급사회에서는 최초로 사회적 생산에 대거 참여하게 되었다. 이로써 여성억압의 근원이었던 차별적 성별분업의 물적 토대는 약화되었다.

동시에 자본주의는 분명히 여성억압에 기반한 체제다. 자본주의는 이윤추구라는 자신의 목적에 맞게 그전부터 존재하던 여성억압을 이용하고 강화했다. 가령 자본가가 여성 노동자의 임금을 낮추는 핑계로 자본주의 이전부터 존재했던, ‘여성의 본령은 가정’이라는 여성억압적 이데올로기를 활용하는 사례를 떠올릴 수 있다. 또한 자본주의는 자본주의만의 고유한 여성억압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자본주의 아래서 여성억압의 두드러진 특징은 여성들이 ‘가정주부’로서 뿐만 아니라 ‘노동자’로서도 이중으로 억압받는다는 것이다. 이런 여성의 처지를 두고 사회주의자들은 “이중의 부담”이라고 불러왔다.

이중의 부담 속에 놓인 여성 노동자들은 일터에서도 더 적은 임금을 받는 등 남성 노동자보다 낮은 지위에 있는 경우가 많다. 이와 같이 여성이 사회적 생산에서 점하는 지위가 낮은 것은 상당 부분, 자본주의 생산 동학과 여성의 생물학적 특성 사이의 모순에서 기인한다. 자본주의 생산관계는 노동자들로부터 생산과정, 노동과정에 대한 통제권을 점점 빼앗아간다는 특징을 가진다. 이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 때문이다. 자본가는 생산수단을 소유하며 노동자들은 생산수단으로부터 철저히 분리되어 있다. 노동자는 자본가의 지휘, 기계의 리듬에 맞추어 노동해야 하기 때문에, 여성 노동자가 수유 등의 이유로 쉬어야 할 필요가 있을 때에도 그 필요를 전자본주의적 생산과정에서처럼 충족시키기 어렵다. 그래서 여성들은 자본가의 입장에서 중단 없이 일할 수 있는 남성에 비해 열등한 노동력으로 고착화되고, 이는 여성에 대한 각종 차별을 낳는다.

이런 사실은 최근의 연구에서도 확인된다. 가령 성별임금격차에 대해 성차별적 이데올로기로 인한 고용주의 차별적 대우, ‘여성의 일’이라는 편견 때문에 여성들이 돌봄, 청소, 요리와 같은 저임금의 열악한 직종에 집중되는 것 등이 종종 원인으로 제시되지만, 최근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경제학자 클라우디아 골딘의 연구에 따르면 위와 같은 요인들을 통제해도 성별임금격차는 거의 없어지지 않거나 약간 개선될 뿐이며, 성별임금격차의 원인은 노동 자체의 특성에 있다. 노동자가 승진, 임금인상으로 고소득을 얻으려면 정해진 근무시간이 아니더라도 고용주의 긴급 호출에 언제든 지체없이 대응할 수 있는 상태(‘온콜(on-call)’)에 있어야 하는데, 이는 자녀 양육의 필요와 충돌한다. 이때 양육을 주로 담당하는 것이 여성이기에 여성이 승진이나 임금인상을 포기하고 양육에 집중하는 선택을 하게 되고, 남성보다 소득이 낮아진다는 것이다. 골딘의 연구는 대상을 대졸 여성, 고소득 전문직으로 한정하고 있지만 실제로 자본가가 생산과정을 통제하고, 노동자는 자본가가 원하는 리듬에 맞추어 기계를 돌리거나 사무실에 나오도록 요구받는 것은 일부 직종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며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자체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 여성이 여전히 일터에서 남성에 비해 불리한 위치에 놓이고 사회적 생산에 동등하게 참여하지 못하는 현상의 배후에 자본주의적 생산과정 자체의 특성이 있고, 이것을 건드리지 않는 한 차별적 성별 노동분업을 해결하기 어렵다는 사실이 자유주의적 관점의 연구에서도 드러나는 것이다.

요컨대 자본주의에서는 생산력의 발전으로 차별적, 억압적 성별분업을 없앨 물적 토대가 마련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차별적, 억압적 성별분업이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로 특징지어지는 자본주의 생산관계에 있다. 그렇기에 여성억압의 근본 원인인 차별적 성별 노동분업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를 철폐하고, 자본주의의 핵심인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사회적 소유로 대체해야 한다. 자본주의와 싸우지 않고서는 여성억압을 일부 완화시키거나 차별을 어느 정도 규제할 수는 있을지라도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차별을 완전히 철폐하기는 어렵다. 여성억압과 ‘적당히’가 아니라 ‘끝까지’ 싸우고 싶다는 여성들의 열망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여성억압의 근본 원인 자체를 건드리고, 자본주의와 싸우는 여성해방운동이 반드시 필요하다.

둘째, 여성들이 성폭력, 가정폭력 등 각종 폭력적 상황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중요한 원인이 자본주의이기 때문이다.

여성해방운동이 자본주의와 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면 간혹 ‘그렇지만 여성들이 겪는 남성에 의한 성폭력, 가정폭력 등은 자본주의와 싸운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라는 반응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볼 수 없다. 성폭력, 가정폭력에는 여러 원인이 있지만 여성들이 그와 같은 폭력적 상황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중요한 원인은 자본주의다.

예를 들어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한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공식적 성과평가가 존재하는 조직, 매우 빠른 속도로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 직장, 저녁근무가 빈번한 일터, 비정규직, 정규직 등 고용형태 차별이 만연한 환경일수록 성희롱을 경험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송민수, 「이슈분석: 직장 내 성희롱은 왜 발생하는가? 그리고 피해자들은 어떤 어려움에 처하는가?」, 『월간 노동리뷰』, 2018년 3월호). 자본가가 일터에서 노동자들을 강하게 통제하고 착취할수록 성폭력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또한 최근 직장갑질119와 아름다운재단이 여론조사기관 ‘엠브레인 퍼블릭’에 의뢰해 2023년 8월 진행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 26%는 입사 이후 직장 내 성희롱을 경험한 적 있다고 답했는데, 비정규직의 성희롱 경험 비율은 31%로 정규직(22.7%)보다 높았고 비정규직 여성(232명)의 경우 10명 중 4명꼴(38.4%)로 성희롱 피해를 겪었다고 응답했다.

가정폭력 문제에서도 피해 여성들이 남편의 폭력에도 불구하고 그 관계 속에 계속 머무르거나, 탈출했다가도 다시 돌아가는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 자립 문제이다(박명혜, 「부부폭력 피해여성의 심리사회적 요인이 자립의지에 미치는 영향 연구: 쉼터 입소 여성을 중심으로」, 상명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9). 최근에는 신체적 폭력, 언어적 폭력뿐만 아니라 경제권을 독점함으로써 배우자의 행동을 통제하는 ‘경제적 폭력’ 또한 가정폭력의 범주로 포괄되고 있다. 신체적, 물리적 힘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폭력뿐만 아니라 경제적 폭력의 피해자 중 다수가 여성이라는 사실은 가정 폭력이 물리적 힘 외에도 구조적으로 결정되는 힘의 관계를 반영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렇듯 여성을 열악한 사회경제적 조건으로 밀어 넣는 자본주의는 일터 내 성폭력과 가정 폭력의 유력한 배후다. 여성에 대한 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자본주의와 싸워야 한다.

셋째, 지금 여기의 여성들은 일자리, 주거, 부채 등 자신들의 삶의 문제를 실제로 해결할 수 있는 운동을 원하고 있고, 여성해방운동이 이 열망을 받아안으려면 여성들의 삶의 문제의 주범인 자본주의와 싸워야 한다.

여성해방운동이 하필 지금 여기에서 자본주의와 싸워야 하는 무엇보다 증요한 이유는, 여성들이 운동 속에서 제기해온 과제를 수행하고 그들의 열망을 받아안기 위해서다. 여성들은 지금 일자리, 주거, 부채 등 자신들의 삶의 문제를 실제로 해결할 수 있는 운동을 원하고 있다. 여성해방운동이 이 열망을 받아안으려면 여성들의 삶의 문제를 야기하는 주범인 자본주의와 싸우는 운동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일자리, 주거, 부채 등 여성들의 삶의 문제는 계속 악화되어 왔고, 이러한 배경 속에서 2015년경 여성해방운동의 고양이 시작되었다.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 보면 2015년부터 고양되기 시작한 여성해방운동은 온라인에서 남성들의 여성혐오적, 차별적 언행에 대한 메갈리아 등의 ‘미러링’과 같은 반격을 중심으로 전개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2016년의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에 대한 추모 흐름이 대중적으로 확산된 것, 2018년의 혜화역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 시위가 전례 없는 규모로 이루어진 것, 낙태죄 폐지 운동이 힘있게 벌어지고 2019년 4월 결국 낙태죄가 폐지된 것 등을 결코 설명할 수 없다. 온갖 노력을 다 해도 결국 여자라는 이유로 남자 동기들보다 취업이 잘 안되고, 저임금 계약직 일자리나마 지키기 위해 일터에서의 성폭력, 차별적 언행을 참아야 하고, 열악한 주거환경에서 매일 여성 대상 범죄 피해에 대한 불안에 시달려야 하고, 미래가 불안정한 삶 속에서 연애를 하다가 임신이라도 하게 되면 졸지에 혼자 부담을 떠안고 범죄자가 될 위험까지 무릅써야 하는 현실. 이것이 여성들이 분노한 현실이었다. 즉 당시 여성들의 입장에서, 오랫동안 누적된 여성억압에 대한 분노와 악화일로를 걷는 각종 삶의 문제로 인한 좌절은 결합되어 있었다. 한편 2016년~2017년 박근혜 퇴진 촛불투쟁의 경험은 민중들 사이에서 박근혜 정권뿐 아니라 일상, 학교 등 사회 곳곳의 부당하고 비민주적인 질서에 대해 저항하며 삶의 문제 해결을 당당하게 요구하는 분위기를 조성하였고, 이는 여성해방운동이 더욱 고양되고 확대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이런 흐름을 고려할 때 앞서 살폈듯이 일자리, 주거, 부채, 빈곤 등 여성들의 삶의 문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여성해방운동의 과제로 제기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성해방운동은 온라인상의 여성혐오적 언행, 여성에 대한 폭력이나 범죄, 개별 가해자들의 성폭력, 각종 문화적 및 담론적 성차별에 대한 투쟁을 여성들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본주의와 싸우는 투쟁과 결합시키며, 급진화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앞서 이미 서술하였듯이 페미니즘 자체의 한계로 인해 여성해방운동은 그러한 과제를 수행하지 못하였다. 이에 따라 2019년 4월 낙태죄가 폐지되는 성과를 거두며 고양의 절정에 달한 여성해방운동은 이후 정체되기 시작했다. 그 다음 해인 2020년에는 세계대공황이 발발하여 민중들의 삶 전반이 크게 악화되는 가운데 특히 청년 여성들의 삶이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문재인 정권이 그해 시작된 코로나19 유행을 핑계로 민중들이 모이고 투쟁하는 것을 억제하고 사회 전체적으로 정치적 분위기가 위축, 침체된 것, 민주당이 2020년 4월 총선에서 압승함으로써 시험대에 올랐으나 민중의 삶의 문제 해결에 철저히 무능한 모습만 보임으로써 자유주의세력의 위기가 본격화된 것, 박원순 성폭력 사건에서 기존 페미니즘 세력이 자유주의세력과 일체화된 모습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 등은 여성해방운동이 활력을 상실하는 속도를 더욱 빠르게 만들었고, 여성해방운동은 20대 여성들의 자살률이 치솟으며 ‘조용한 학살’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상황에서도 여성들의 삶의 문제에 대해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만약 여성해방운동이 이때 페미니즘이라는 틀을 깨고 넘어서서, 여성들의 삶의 문제들 배후에 있는 주범인 자본주의를 문제 삼으며 싸우는 흐름으로 발전하고 급진화되었다면, 2020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투쟁의 동력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고 지금처럼 활력을 잃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여성해방운동이 자본주의와 싸워야 하는 이유는 어떤 추상적인 당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여성해방운동이 지나온 길, 지금 서 있는 곳을 직시한 결과로 도출되는 절실한 과제다. 지연되었던 세계대공황은 이미 본격화되고 있고 여성들은 물가상승, 일자리, 부채, 빈곤 등으로 고통받으며 여성에 대한 차별, 억압 때문에 더 열악한 위치로 내몰리고 있다. 여성들은 더 이상 단지 문화적, 담론적 영역의 성차별에 대해서만 비판하고 싸우는 것에 만족할 수 없다. 또한 개별적인 채용성차별 사안에 대해 대응하고, 윤석열정권의 여성노동 관련 정책을 비판하는 것이나, 여성노동자 투쟁 집회에 결합하는 것만으로는 여성들의 열망을 받아안을 수 없다. 여성들의 삶의 문제의 주범이 자본주의라는 것을 분명히 지목하며 여성들의 분노를 한 곳으로 모으고, 문제 해결의 전망을 제시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힘 있는 싸움을 만들어내야 한다.

3. 자본주의와 싸우는 여성해방운동을 만들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

첫째, 여성해방운동의 현 상황을 직시하고, 운동이 활력을 잃은 이유에 대한 평가와 분명한 과제설정을 하자.

자본주의와 싸우는 여성해방운동을 만들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우선 여성해방운동의 현 상황을 직시하고, 고양되었던 운동이 활력을 잃은 이유에 대한 평가와 분명한 과제설정을 하는 것이다.

운동의 큰 흐름이 한번 고양되었다가 쇠퇴한 지금, 이에 대해 평가를 하고 앞으로의 과제를 설정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그러나 현재 페미니즘 운동 내에서는 이것조차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다. 외부적 조건인 20대 남성의 안티페미니즘 정서, 수구세력 집권을 탓하고 ‘백래시’를 규탄하는 것 외에, 왜 그렇게까지 고양되었던 여성해방운동이 활력을 잃게 되었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평가하는 목소리 자체를 듣기가 어렵다. 페미니즘 운동의 주체적 상태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경우가 간혹 있으나 앞서 살폈던 엄혜진의 경우처럼 ‘래디컬 페미니즘’과 같은 일부 흐름이 문제였다는 식의 협소한 평가, 신자유주의나 능력주의를 충분히 비판하지 않았다는 식의 피상적인 평가에 그친다. 이러한 평가에 대해 비판이나 반론, 논쟁 자체가 되지 않고 있다. 진보운동 전반이나 사회주의 운동에서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

이런 상황은 극복되어야 한다. 여성해방운동이 활력을 잃은 이유에 대해 제대로 평가하고, 앞으로의 과제를 설정해야 한다. 이에 대해 제대로 토론하고 논쟁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한다.

둘째, 페미니즘이라는 기존의 사상적 틀을 넘어서서, 사회주의 여성해방운동으로 나아가자.

앞서 살펴봤듯이 여성해방운동이 활력을 잃은 원인은 페미니즘 자체의 사상적 한계 때문이었다. 페미니즘은 여성억압의 근본 원인을 과학적으로 규명할 수 없고 그에 따라 여성해방의 전망도 제시하기 어려운 사상이라는 한계를 갖고 있었고, 이러한 한계 때문에 처음부터 여성들이 운동 속에서 제기한 과제를 수행할 수 없는 사상이었다. 끊임없이 서로 대립하고 논쟁한 ‘래디컬 페미니즘’과 상호교차성을 표방한 기존 페미니즘 모두, 여성들의 열망에 응답하는 데 실패했다.

그렇다면 이제 여성해방운동의 더 이상의 발전에 질곡이 된 페미니즘이라는 사상적 틀을 넘어서야 할 때다. 이제 ‘어떤 페미니즘이냐’라는 낡은 사고틀에서 벗어나서 페미니즘이라는 사상 자체의 한계를 직시해야 한다. 지금 여성해방운동은 페미니즘이라는 기존의 낡은 틀을 깨고 새로운 운동을 건설하여 질적인 도약을 하느냐, 아니면 기존의 낡은 틀 속에 머무름으로써 계속 소진되어가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운동이 필요하다. 그 운동은 여성들이 2015년부터 제기해왔던 질문들에 응답할 수 있는 운동이어야 한다. 여성억압의 원인을 과학적으로 규명하고, 여성들의 악화되는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전망을 제시할 수 있는 운동이어야 한다. 여기에 부응할 수 있는 것은 자본주의와 싸우는, 사회주의 여성해방운동이다. 여성과 남성의 관계를 고정된 것으로 보기에 여성억압의 ‘이전’도, ‘이후’도 그려낼 수 없는 페미니즘과 달리,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은 여성과 남성의 관계가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 생산의 변천에 따라 변화한다는 점을 짚기에, 여성억압의 원인을 과학적으로 규명하고 여성억압의 ‘이전’과 ‘이후’를 모두 제대로 그려낼 수 있다. 여성억압의 현상을 강력하게 규탄할지라도 결국 자본주의 체제와 타협하는 길을 걷게 되는 페미니즘과 달리, 사회주의 여성해방운동은 여성들의 삶의 문제 해결을 위해 자본주의를 철폐하고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는 분명한 목표를 세운다.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이라는 새로운 사상적 틀을 모색하자. 사회주의 여성해방운동을 만들어나가자.

셋째, 여성해방을 위해 반자본주의를 주장하는 발언대회, 선전전, 집회, 잡지 발간 등의 사업들을 진행함으로써, 자본주의와 싸우는 사회주의 여성해방운동을 가시화하고 조직적인 흐름을 만들어나가자.

발제자는 2019년경부터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의 입장에 서서 여성해방운동이 자본주의와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활동을 해왔다. 그런데 주로 학습, 선전 사업을 반복하였고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지 못하여, 새로운 주체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한계가 있었고 조직적인 흐름을 만들지 못했다. 이 점을 스스로 반성적으로 평가하며, 본 발제문을 통해 이제 여성해방운동이 자본주의와 싸워야 한다는 점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뜻을 모아 발언대회, 선전전, 집회, 잡지 발간 등 다양한 사업들을 함께 진행함으로써 자본주의와 싸우는 사회주의 여성해방운동을 가시화하고, 이를 토대로 조직적 흐름을 만들어가자는 제안을 드리고자 한다.

가령 내년 3월 8일 여성의 날에는 여성 노동자들, 청년 여성들의 삶의 문제를 폭로하고 여성해방운동이 자본주의와 싸워야 한다는 점을 힘 있게 주장하는 발언대회를 개최함으로써 이런 흐름을 가시화할 수 있을 것이다. 취지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뜻을 모아 ‘채용 및 직장 내 성차별 반대! 청년 여성에게 안정적 일자리를 제공하라’, ‘부모 모두 육아휴직을 의무화하고 육아휴직 기간 동안 통상임금 100%를 지급하라’와 같은 요구를 내건 선전전, 집회를 함께 준비하여 진행할 수도 있다. 자본주의와 싸우는 사회주의 여성해방운동을 더 널리 알리기 위해 잡지를 발간할 수도 있다. 이러한 활동을 함께 하는 과정에서 자본주의와 싸우는 여성해방운동에 공감하고, 함께 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조직적 흐름을 형성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오늘 집담회에 모인 분들의 적극적인 의견 제시를 기대한다.

마치며

이제까지 발제된 내용을 요약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2015년경부터 고양되었던 여성해방운동은 현재 활력을 잃은 상태에 있고, 그 원인이 ‘백래시’와 같은 외부적 조건 이전에 페미니즘 자체의 사상적 한계에 있다. 페미니즘은 그 사상적 한계 때문에 여성들이 운동 속에서 제기한 두 가지 과제, 여성억압의 근본 원인 규명과 여성들의 삶의 문제 해결이라는 과제에 응답하지 못하였고, 이에 따라 어느 순간 여성해방운동의 더 이상의 발전을 막는 질곡이 되었으며, 여성해방운동은 결국 페미니즘의 틀을 깨고 넘어서서 발전하지 못함에 따라 활력을 잃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에게는 여성들이 제기한 과제에 응답할 수 있는 새로운 여성해방운동이 필요하며, 그것은 자본주의와 싸우는 여성해방운동이어야 한다. 여성해방운동이 자본주의와 싸워야 하는 이유는 첫째, 여성억압의 근본 원인인 차별적 성별 노동분업을 온존시키는 것이 자본주의이기 때문이고, 둘째, 여성들이 성폭력, 가정폭력 등 각종 폭력적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중요한 원인이 자본주의이기 때문이고, 셋째, 지금 여기의 여성들은 일자리, 주거, 부채 등 자신들의 삶의 문제를 실제로 해결할 수 있는 운동을 원하고 있고, 여성해방운동이 이 열망을 받아안으려면 여성들의 삶의 문제의 주범인 자본주의와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와 싸우는 여성해방운동을 만들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여성해방운동의 현 상황을 직시하고, 운동이 활력을 잃은 이유에 대한 평가와 분명한 과제설정을 해야 한다. 둘째, 페미니즘이라는 기존의 사상적 틀을 넘어서서, 사회주의 여성해방운동으로 나아가야 한다. 셋째, 여성해방을 위해 반자본주의를 주장하는 발언대회, 선전전, 집회, 잡지 발간 등의 사업들을 진행함으로써, 자본주의와 싸우는 사회주의 여성해방운동을 가시화하고 조직적인 흐름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페미니즘의 한계에 대해, 페미니즘이 아닌 사회주의 여성해방운동으로 나아가자는 주장에 대해, 앞으로 이루어져야 할 구체적인 실천에 대해 오늘 모인 청중분들의 의견은 다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쟁점에 대한 의견이 서로 다르더라도 여성해방을 열망하는 마음, 해방을 향한 여성들의 투쟁이 다시 힘 있게 벌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동네 호프집 건너편 테이블에서도 청년들이 여성억압, 혜화역 시위에 대해 열띤 논쟁을 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던 2018년 여름의 열기, 성폭력을 저지른 안희정에 대해 1심에서 무죄판결이 선고되었던 날 저녁 서울서부지방법원 앞에 모인 사람들의 분노와 기세, 드디어 형법상 낙태죄를 폐지하는 헌법재판소 결정이 나왔던 날의 기쁨…… 우리는 모두 기억하고 있다. 그때의 여성해방운동이 활력을 잃었을지라도 그때 운동을 일으켰던 여성들의 억압에 대한 분노와 해방에 대한 의지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제 여성들의 열망을 받아 안을 수 있는 새로운 운동으로, 자본주의와 싸우는 사회주의 여성해방운동으로, 다시 활력 있고 강력한 여성해방운동을 세워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