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여러분이 도시노동자들과 동맹하여 자본에 대한 무자비한 투쟁을 벌이면서 242개 지령의 강령을 실현하기 시작하는 때, 전 세계가 우리와 여러분을 원조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그 강령의―지금 현 상태가 아니라 그 핵심의―성공이 보장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본의 지배와 임금 노예제가 끝장날 것이다. 그것은 사회주의 시대, 평화시대, 노동인민 시대의 시작일 것이다.”
– 「한 정치평론가의 일기에서. 농민과 노동자」(라보치 6호)
나는 <맑스, 레닌의 토지국유화 학습모임>의 마지막 시간에 마지막 글의 마지막 문장을 읽으면서 적지 않은 감동을 느꼈다. ‘그래, 그래, 바로 이거야!’
학습모임은 6월 25일부터 4회에 걸쳐서 진행되었으며, 맑스의 지대론과 「엥겔스의 주택문제에 대하여」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다고 할 수 있는 ‘맑스, 레닌의 토지국유화론’을 대중적으로 알리고자 하는 취지에서 시작되었다. 학습모임 때마다 수강하신 분들의 출석률은 50% 이상이었고, 모두들 진지하고 성실한 태도로 학습과 토론에 참여했다. 전북녹색연합에서 활동하시는 어떤 분은 매번 전주에서 올라오셔서 학습모임에 네 번 모두 참여하는 열성을 보이기도 했다.
주요 학습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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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습은 주로 레닌이 1907년에 쓴 『1905∼1907년 제1차 러시아혁명기 사회민주주의의 농업강령』(이하 『사회민주주의 농업강령』)을 가지고 공부했는데, 1차에서 맑스의 「토지국유화에 관하여」와 레닌의 『사회민주주의 농업강령』 1장을 공부했다. 여기서는 맑스가 토지국유화를 주장하는 이론적 근거를 공부했고, 레닌의 『사회민주주의 농업강령』 1장에서는 러시아 농업문제의 실상(소수의 대토지소유자가 압도적인 규모의 토지를 소유하고 대다수 농민은 생활조차 유지하기 힘든 토지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 따라서 농업문제 해결의 핵심은 대토지 소유자의 토지를 빼앗아 농민에게 나눠주는 것이라는 점)을 통계를 통해 확인하였다.
- 2차 학습에서는 『사회민주주의 농업강령』 2, 3장으로, 2장에서는 농업문제 해결에서 핵심은 봉건적 토지소유 관계를 철저하게 철폐하는 것인바, 레닌은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농업강령이 이런 부분에서 부족한 강령이었음을 자기비판하고, 1905년 혁명 이후 분출한 농민들의 요구가 바로 토지국유화였음을 확인했다. 또 이 토지국유화 요구는 사실상 봉건적 토지소유 관계를 철폐한 후 그 위에서 농민이 토지를 임차하여 자유로운 농업경영을 하겠다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요구인데, 나로드니키는 이런 요구를 마치 사회주의인 것처럼 포장했다고 비판했다. 3장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내 농업강령 논의가 현실의 정치상황에 대해서 지나치게 고려하면서 강령의 경제적, 이론적 토대를 제대로 세우지 못했고, 그 토대는 바로 맑스의 지대론임을 밝힌다. 레닌은 맑스의 지대론을 간명하게 소개하고 이를 가지고 멘셰비키 소속으로 잘못된 자치체소유화론을 주장한 마슬로프의 입장을 비판한다.
- 3차 학습에서는 『사회민주주의 농업강령』 4장, 5장을 공부했다. 4장에서 레닌은 농업강령과 관련된 정치적 논의들, 특히 멘셰비키의 자치체소유화론을 검토, 비판한다. 멘셰비키는 러시아 민주주의 혁명을 끝까지 제대로 추진할 생각을 하기는 커녕 혁명을 하다 반동이 도래할 가능성부터 미리 걱정하면서 지레 겁을 먹었다. 그래서 중앙권력 차원에서 반동이 도래한 상황에서의 토지국유화는 반동에게만 이롭기 때문에 지방자치정부가 지주로부터 몰수한 토지를 소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멘셰비키 입장의 문제는, 이미 농민들이 철저한 농업혁명을 위해 모든 토지의 국유화를 주장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농민들의 토지를 몰수할 경우 그들이 반동으로 돌아설 수 있다고 터무니없는 걱정을 하며 분여지 등 농민 소유지의 사적 소유는 인정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멘셰비키의 입장은 4장에서 철저히 비판된다. 5장은 레닌의 탁월함이 바로 철저하고 끈기 있는 사실 조사에 있음을 드러낸다. 이 장에서 레닌은 제1차, 2차 두마의 회의록을 꼼꼼히 읽은 후 당시 존재하던 각 정치세력이 농업문제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 해당 정치세력 대표자들의 입을 통해 생생히 드러낸다.
- 4차 학습에서는 『사회민주주의 농업강령』 후기(1917. 9.)와 「R.S.D.L.P.(B.) 7차 (4월) 전러시아 협의회. 농업문제에 관한 보고」(1917. 4.), 「한 정치평론가의 일기에서. 노동자와 농민」(1917. 9.)을 공부했다. 『사회민주주의 농업강령』은 출판되자마자 차르의 검열기구에 의해 압수당해 폐기되었고, 잔존해있던 한 권의 책을 가지고 1917년 9월경 재출간되었다. 1917년 2월 혁명 이전 레닌은 토지국유화를 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요구로 설명했다. 그렇지만 『사회민주주의 농업강령』 3장에서 이미 이 요구의 도덕적 의의로 그것이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 전반에 대한 공격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사회민주주의 농업강령』 후기와 「농업문제에 관한 보고」, 「한 정치평론가의 일기」에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일정 정도 완수된 상황에서 혁명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며 토지국유화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 전반에 대한 공격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점을 부각한다. 토지국유화 및 그와 더불어 당시 농민들이 제기하던 농업도구의 공적 소유는 사회주의를 향한 한 걸음, 또는 여러 걸음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레닌이 토지국유화 요구가 지닌 과도적 요구로서의 성격을 잘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학습모임을 하면서 나의 배경지식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특히 러시아 혁명사에 대해 아는 게 그다지 없다보니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나 당파들에 대한 레닌의 비판이 어떠한 맥락에서 나온 것인지 알기가 쉽지 않았다. 당시의 인물과 사건에 대해 별도의 자료를 조금 찾아서 읽으니 약간은 교재 이해에 도움이 되었지만, 개인사정으로 1회차 학습에 빠지고 2회차부터 나가다보니 공백을 메우기가 정말 쉽지 않았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참여자들도 비슷한 상황이라서 3회차와 4회차 학습 때는 당시 정치세력들의 이름과 성향, 러시아 혁명사의 개략적인 흐름 등을 학습간사가 따로 보충설명을 해주는 시간을 가졌다. 이 부분은 차후 동일내용의 학습모임을 진행하게 될 때 좀 더 신경을 쓰면 좋을 것으로 생각한다. 러시아 혁명사에 관한 학습을 위해 추가적인 학습시간을 배정한다면 참여자들의 이해도와 학습 몰입도를 높일 수 있지 않을까?
‘토지국유화’라는 단어를 처음 듣는 사람은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해?’하고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나도 처음에는 그랬다. 그러나 학습모임에 참가해서 글을 읽고 소화하면서 토지국유화의 정당성과 필연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느끼고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이 모임에 참여한 것은 토지를 포함한 부동산 가격 폭등에 대해 평소에 가지고 있던 문제의식 때문이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진행 중인 부동산 폭등은 극복 불가능한 불평등을 만들어 내고 있으며, 현 정권이나 자칭 ‘부동산문제 전문가’들이 내놓는 해결책은 사태를 악화시키거나 소폭의 일시적 증상완화를 가져올 뿐이다. 수십 년 전부터 “공급을 늘리면 가격은 떨어진다”는 순진하고 비현실적인 논리를 내세우며 신도시에 아파트를 엄청나게 지어댔지만 다주택 투기꾼들의 배만 불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아파트 가격은 폭등을 거듭했고 이제는 평범한 노동자가 급여를 저축해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불로소득을 세금으로 환수하면 된다는 발상도 실현 가능성이 낮을 뿐만 아니라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가 없다. 자본주의를 그대로 둔 채 어떤 ‘해결책’을 실시해봤자 문제를 해결하기는 불가능하다.
“국유화는 어떠한 경우에도 물질적으로나 도덕적으로도 큰 의의를 지닌다. 그 물질적 의의란 국유화만큼 러시아의 중세적 유제(遺制)를 철저히 일소하고 아시아적 반(半)쇠퇴상태에 있는 농촌지역을 완전히 혁신시키며 농업의 진보를 급속히 진전시킬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점이다. … (중략) … 혁명의 시기에 있어서 국유화의 도덕적 의의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사적 소유의 한 형태’에 대하여 반드시 전 세계에 반향을 일으키는 일격을 가하는 것을 돕는다는 점이다.”
– 제3장 국유화와 자치체소유화의 이론적 기초, 『1905~1907년 제1차 러시아혁명기 사회민주주의 농업강령』
“그러나 국유화는 다른 이유에서도 필요하다―국유화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에 강한 타격을 가한다. 토지의 사적 소유의 폐지 후에 러시아의 모든 것이 이전처럼 남아 있으리라고 상상하는 것은 단지 어리석을 뿐이다.”
– 「농업문제에 관한 보고」
토지국유화가 단지 현재 사유화되어 있는 토지를 국유화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깨는 첫 걸음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겐 큰 깨달음으로 다가왔다.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깨는 것이 당장은 저 멀리에 있는듯하지만 토지국유화가 그 길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의욕이 솟아나는 기분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토지국유화에 대해 내가 이 학습모임 이전에는 막연한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학습모임에서 읽은 글들 중간 중간에서 토지국유화에 대한 막연함을 씻어줄 구체적인 고민들을 만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매우 자주 국유화에 반대하면서 그 이유가 국유화는 거대한 관료적 장치를 요구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사실이지만 국가 소유란 모든 농민이 토지를 국가로부터 임차하는 것을 의미한다. 임차지들의 재임대는 금지된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그리고 어떠한 종류의 토지를 농민이 임차할 것인가의 문제는 관료적이지 않은 적절한 민주주의적 권력기관에 의해 전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
「농업문제에 관한 보고」
“3. 국유화는 모든 토지 소유권이 국가에 귀속되지만 토지의 처분권은 지방의 민주적인 기구에 귀속되는 것을 의미한다.”
– 1917년 강령 초안에서의 농업강령
“1. 모든 교회, 수도원, 왕실, 국가, 그리고 지주 토지들의 몰수.
2. 전체인민의 제헌의회에 의한 새로운 농업제도의 수립 때까지 지주권력 및 특권의 모든 흔적의 폐지와 몰수된 토지의 실제적 관리를 위하여 농민위원회의 설립.”
– 1906년 레닌의 농업강령 초안
내가 발제를 맡았던 ‘제5장 농업문제에 관한 제2차 두마 토론에서 제 계급과 제 정당’을 읽으면서 모든 내용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혁명의 시기에 반동적인 세력의 저항 또한 최고조에 달하게 되며, 혁명의 방향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치열한 토론과 시행착오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나고 나서 보면 마치 레닌이 모든 것을 철저히 계획하여 일사천리로 하나하나 실행에 옮긴 듯이 보이지만, 그 과정에서는 수많은 동조 혹은 반대 세력들과 토론하고 그들에 대한 효과적인 논박을 통해 주도권을 쥐게 됨을 나는 제5장을 읽으면서 가까운 거리에서 볼 수 있었다.
또한 은행자본의 문제에 대해 레닌이 언급한 부분을 읽으면서 지금 시대의 토지 및 부동산 문제와 너무나 닮아있다는 생각을 했다.
“모든 사적 토지의 몰수는 그 토지의 대부분을 저당잡고 있는 은행소유의 수억 루블의 자본의 몰수를 뜻한다. 혁명적 계급이 혁명적 방식으로 자본가들의 저항을 극복하지 않는다면, 이 같은 조치들이 어떻게 취해질 수 있겠는가? 게다가 바로 여기에 무엇보다도 최고로 집중화된 자본, 은행자본의 문제가 있는데, 은행자본은 거대한 나라의 자본주의 경제의 신경중추와 무수한 가닥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래서 도시 프롤레타리아트 못지않은 집중화된 힘에 의해서만 격퇴될 수 있다.”
– 「한 정치평론가의 일기에서. 농민과 노동자」(라보치 6호)
바로 위 인용문은 지금의 현실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사실 나는 위 문장들을 읽으면서 토지국유화가 가져올 혁명적인 효과의 일면을 느낄 수 있었다. 토지국유화는 은행소유 자본의 몰수를 뜻하는데, 은행자본은 거대해질 대로 거대해진 현재 자본주의 체제의 신경중추와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나는 토지국유화가 가져올 효과가 “나 이제 집 걱정 안해도 되네!”를 훨씬 뛰어넘어 더 깊이 자본주의 뿌리까지 미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강좌를 통해, 나는 토지국유화가 2021년의 우리나라에도 절실히 요구되고 있음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지나간 역사와 오늘의 현실이 만나는 체험을 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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