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1일부터 5회에 걸쳐, 사회주의대오추진위원회가 마련한 「주거문제특별강좌」에 참여하였다. 제1강 ‘맑스의 지대론’을 시작으로 제5강 ‘과도적 요구 설명’에 이르기까지 총 5차례의 강의는, 맑스의 지대론에 대한 기초적 이해를 바탕으로, 맑스‧레닌의 저작에 나타난 토지 국유화의 개념과 역사적 전개 과정, 그리고 1872년 부르주아 논객들과 엥겔스의 토론을 통해 주택문제에 관한 150년 전의 사회적 쟁점들의 현재성에 대하여 설명한다. 마지막 5강은, 4차례의 강의를 통해 얻어진 토지와 주택에 대한 마르크스적 해법을 토대로 2021년 한국에서 우리가 무엇을 바꿀 수 있고, 바꾸어야만 하는지 설명한다.
나는 자영업자에서 저임금 노동시장으로 밀려난 50대 중반의 남자이다. 너무도 당연히, 내게 주거안정성은 일상에서 당면한 최우선의 문제이며 감당이 벅찬 고비용의 문제이다. 그러나 노동력은 약화되고 기대수입은 감소하며 주택가격은 상승한다. 결국 내 남은 삶의 주기에서 안정적인 주거보장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대공황의 시기를 지나면서, 많은 중년의 자영업자들이 저임금 노동시장으로 밀려나고 있다. 경제적 몰락을 거치는 과정에서 주택의 소유권이 온전할 수 없다. 이 과정에서 최소한의 거주공간마저 잃게 되면, 이는 즉시 가족구성의 해체와 일상적 사회 관계망의 단절로 이어지며 극심한 고독과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어떤 이에게 주택은 별다른 노력 없이 경제적 자산을 획기적으로 늘려주는 경제적 수단이다. 또 어떤 이에게 주택은 삶의 나락의 경계를 구분 짓는 넘어설 수 없는 임계점이다.
왜 이런 양극적 문제가 발생할까? 도대체 이것이 해결 가능한 문제이긴 할까?
총 5번의 강좌는 이러한 문제의식에 명확하게 답을 한다.
처음 두 차례의 강의에서, 맑스는 ‘지대론’을 통해 왜 똘똘한 강남아파트 한 채가 청와대 수석자리도 마다할 만큼 획기적인 자산증식의 수단이 될 수밖에 없는지를 친절(?)하게 설명한다.
‘지가’는 ‘지대’를 ‘이자율’로 나눈 값과 같다. 분자에 해당하는 지대는 자본주의에서 상승하는 경향이 있고 분모에 해당하는 이자율은 자본주의에서 하강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자본주의에서 ‘지가’와 ‘주택가격’은 필연적 상승 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토지를 사적으로 소유한 토지 소유자는 자본가로부터 지대를 수취하고 자본투하로 인해 향상된 토지의 생산성을 아무런 노력 없이 귀속함으로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조차도 불필요한 존재이다. 노동자가 생산한 잉여가치의 분배과정에서 자본가와 토지소유자는 투쟁적으로 경합한다.
3강에서 맑스‧레닌의 저작을 통해 과도적 요구로써 토지국유화의 의미와 가능성을 살펴보았다. 맑스는 토지의 사적소유를 철폐하는 토지국유화가 오히려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 발전에서 비롯된 사회적 필연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레닌은 ‘토지국유화’를 초기 러시아 부르주아 혁명에서 ‘민주주의적’ 과제로 보았고, 1917년 이후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과도적 요구로 제시했다.
4강은 150년 전 엥겔스와 부르주아 논객들이 주택공급을 놓고 격돌한 일련의 논쟁을 살펴본다. 당시 대공업으로의 이행과정에서 노동자들의 도시 집중현상으로 독일의 대도시에서는 주택난이 심화되고 있었다. 프루동주의자들의 도덕적 판단에 기초한 ‘정의’로운 주택문제 해결책에 대해 엥겔스가 비판, 반박했던 역사적 사실을 지켜보면 뚜렷한 기시감을 갖게 된다. 바로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저소득층에 대한 시혜적 공공주택 확대정책과 토지공개념의 소환이 150년 전 논쟁의 쟁점과 형식에서 전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부동산 가격 폭등과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심화는 자본주의 제도가 가지고 있는 필연적 구조의 문제이다. 잉여가치를 통해 유지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잉여가치 생산의 유일한 주축인 노동자를 배제하고 지주계급만을 위한 주택정책은 수정되어야 한다. 잘못 출발한 문제의 본질을 변화시키지 않고 문제 일부를 개량해서 발전시키겠다는 부르주아 진보세력의 개량주의적 접근 역시 오히려 문제의 본질을 은폐시킨다.
그렇다면 무엇을 하여야 할까?
5강은 이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모든 토지를 국유화하고, 1가구 1주택 초과 소유 주택을 몰수하라”
세상은 온통 정의로운 담론들과 해시태그로 넘쳐나는데, 왜 나의 일상은 정의롭지 못할까? 라는 질문을 가져본 적이 있다면, 다소 불편하고 어색하더라도 「과도적 요구 학습모임」에 참석해보기를 권유한다. 그리고 세상과 나의 삶을 바꿀 첫발을 내딛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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