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대구에 있는 대학생 박한솔 동지가 보내주신 의견입니다. 과도적 요구에 대한 내용은 아래 링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 서론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주권자로부터 선출된 대표자를 중심으로 한 ‘자유위임’의 형식으로 운영된다. 여기서 자유위임이란 ‘국민의 대표자’인 의원이 자신을 선출한 유권자에 구속되지 않고 그들로부터 독립하여 그 권한을 행하는 것으로, 곧 “국가이익을 우선하여 양심에 따라 직무를 수행”하는 것을 의미한다(대한민국 헌법 제46조 제2항).

당초 자유위임은 유권자의 의사에 구속되었을 때 발생할 부작용(예컨대 공익이 아니라 사익에 복무하는 편향)을 방지하기 위해 도입된 개념이다. 그런데 국가일반은 본질적으로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을 통제하는 기구이고, 자본주의에 있어서는 자본가계급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기능하는 억압기구인 탓에, 유권자의 의사는 이들에게 어떠한 영향력도 주지 못하고, 제도적으로 보장된 독립성은 노동대중을 위해 사용되지 않는다. 노동자의 손에 의하여 선출된 국회의원이 노동개악에 찬성표를 던지거나, 자본의 꼭두각시를 자처하며 그들의 편의를 봐주는 배반적인 풍경은 결국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기만적 대의성에 기초해 있는 것이다.

2. 선출직 전반에 대한 소환제 도입

이러한 관점에서 선출직 전반에 대한 소환제 도입 요구는 그 자체로서 부르주아 국가기구의 억압적이며 약탈적인 성격을 완전히 억제할 수는 없을지라도,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한계를 일정 부분 보완하고, 나아가 자본가계급의 의중을 대변하는 데 급급했던 국회의원들이 노동계급의 눈치를 보도록 함으로써, 그들의 반동적 운신의 폭을 좁히는 기능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정보화의 진전과 기술 발전이 급속도로 이뤄지고 있는 최근의 정세에서 정보를 향유할 지위를 독점하고 권위주의적 태도로 민중의 민주적 권리를 제약하는 정치인들을 민중의 총의를 바탕으로 쫓아낼 수 있도록 하는 제도는 민중의 직접정치와 부르주아 정치인의 책임성을 강화하는 방편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선출직 소환제가 반드시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만 이야기할 수는 없다. 지배 이데올로기의 공세가 대중매체의 발달로 인해 과거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자행되는 환경 속에서, 선출직에 대한 소환제가 오히려 국회에 진출한 사회주의 세력을 솎아내는 도구로 악용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과거 차별금지법안 제정에 참여한 일부 자유주의적 국회의원들이 기독교 수구세력에 의해 수시로 차기 총선에서의 낙선 압박을 받고 끝내 법안을 철회한 사건은, 기본적인 인권 보장을 위한 ‘개량적 입법’조차 수구세력의 집요하고 조직적인 백래시에 의해 무산될 수 있다는 현실을 보여주었다.

다만 지난 2006년 지자체장과 지방의회 의원에 대한 주민소환제가 도입된 이후, 이 제도가 정적 제거 혹은 정치적 적대세력에 의해 민의를 왜곡하는 결과를 초래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던 만큼, 선출직 소환제의 부정적인 측면을 우려하기 보다는, 실질적으로 민의를 반영하는 장치로 기능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3. 민중에 의한 직접 헌법개정권, 입법권, 형사소추권 도입

주권자의 의사가 입법 과정에서 개입할 공간이 겨우 지배계급이 마련한 ‘국민(국회)청원’에 불과한 현실이야말로 ‘자유민주주의’의 허구성을 증명하는 사례다.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지배계급의 이익과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수단인 이상 이는 당연한 수순이다. 하지만 인민들이 입법 과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노동계급의 이익을 반영하도록 할 제도 자체가 미비한 것을 그저 납득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에 과도적 요구로 제출된 ‘민중에 의한 직접 헌법개정권’과 ‘입법권’, ‘형사소추권’은 당면한 정세를 헤쳐나갈 노동계급이 지배계급에 대항할 주도권을 확보하고, 더욱 유리한 국면을 조성할 수단으로서 활용될 가치가 있어 보인다.

특히 민중에 의한 형사소추권(즉 사인소추권)은 해외의 몇몇 국가에서는 이미 시행 중인 제도이다. 프랑스는 범죄 피해자가 직접 소추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사소권(私訴權, Action civile) 시행하고 있고, 독일에서는 주거침입, 비밀침해 등 경범죄에 대하여 사인소추를 예외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피의자를 대신하여 검사만이 공소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형사소송법 제246조(국가소추주의) “공소는 검사가 제기하여 수행한다”), 지난 2020년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가 신설됨에 따라 검찰이 독점하고 있던 공소권의 일부를 공수처가 가져오게 되었으나 이는 수사기관 내부의 권한 분산에 불과하다.

수사기관이 기소권을 독점하면서 발생한 병폐는 익히 알려진 바다. 검찰은 지배계급의 편에 서서 그들의 편의를 제공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을 뿐, “공익의 대표자”로서 그들의 직무를 행한 적이 없다(검찰청법 제4조(검사의 직무) 제1항 “검사는 공익의 대표자로서…”). 경찰 또한 마찬가지다. 검경 수사권 조정 이후 경찰은 1차 수사종결권을 가져가면서 자체적인 판단에 따라 불송치 결정을 남발하는 탓에 피로감을 호소하는 국민들이 많아졌다고 한다(한국일보, “수사권 조정하자 고소인이 ‘죄인’됐다… 접수는 막히고, 수사는 깜깜”, 2021. 6. 28.). 이처럼 수사기관 간의 기소권 분산만으로는 형사사법이 국민을 위해 기능할 것으로 기대할 수 없으며, 오히려 지배계급의 입맛에 따라 형사사법이 좌우될 여지를 더욱 폭넓게 제공할 뿐이다. 민중에 의한 직접 형사소추권 도입이 국가기관의 억압적 본질을 바꿀 수는 없겠지만, 국가의 기소독점이 야기하는 문제를 일정 부분은 해소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4. 국가보안법 폐지

사회주의 세력의 확장을 방해하며 사상의 자유마저 침해하는 대표적 악법 ‘국가보안법’은 민주주의 심화 부문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굳이 일제의 치안유지법이 모태였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더라도, 2021년을 살아가는 인민들에게 철 지난 반공·애국 이데올로기를 사실상 강제하고, 자본주의 너머의 새로운 사회를 갈망하는 노동계급의 전망을 짓밟는 반민주 악법이다.

나아가 국가보안법은 민족통일을 방해함은 물론, 북한 사회에 대한 연구활동이라도 서슴없이 탄압한다. 얼마 전 난데없이 국가보안법상 ‘회합·통신’ 혐의로 체포된 4.27시대연구원 이정훈 위원은 국정원과 경찰이 제시한 혐의를 납득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정훈 위원은 북한과 이른바 ‘내통’한 사실이 없는 건 둘째치고, 이미 여러 차례 국내에 공개된 자료를 바탕으로 북한 사회에 대한 이해를 돕는 서적을 발간했을 뿐인데 무자비한 사상 탄압을 당한 것이다. ‘자유주의 세력이 정권을 잡았으니 한숨 돌릴 수 있겠다’라는 일부 좌파들의 기대가 환상에 불과함이 드러난 사건이다. 사회주의운동과 통일운동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남용되고 있는 국가보안법은 폐지되어야 마땅하다. 다만 이것은 몇몇 단체가 국지전의 방식으로 돌파할 성질이 아니다. 일부 자유주의 세력이 합세한다고 해도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하여 일시적인 통일전선을 구축하여 국보법 폐지 투쟁을 집중적으로 전개하여야 승산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